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1세 (문단 편집) === 골육상쟁 === 1179년 11월, 랭스에서 열린 13세인 프랑스 왕세자 [[필리프 2세|필리프]]의 프랑스 왕 대관식에 참석하고 아키텐 공작의 권위에 걸맞는 선물을 하였으며, 주목할 만한 점은 이때 동생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 2세]]와 함께 각각 아키텐 공작령과 브르타뉴 공작령에 대해 [[필리프 2세]]에게 개인적으로 충성 서약까지 했다는 것이다. 1181년, 리처드는 형인 [[청년왕 헨리]], 동생 제프리와 힘을 합쳐 썽쎄흐와 플랑드르의 반란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필리프 2세를 구했으나.... 이듬해인 1182년 형 헨리와 동생 제프리가 반리처드 아키텐 봉신들과 결탁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아키텐으로 진격하고, 필리프 2세는 뒤에서 은밀하게 그들에게 용병을 지원하는 것으로 리처드에게 은혜를 원수로 되갚았다. 부왕의 아들간의 싸움 중재는 실패하고 전쟁이 재발하여 봄 동안 지속되었다. 아키텐 귀족들의 움직임이 우려할 수준을 넘어서게 되자 상황의 위급함을 판단한 부왕이 리처드에게 가세하여 리처드, 헨리 2세 VS 청년왕 헨리, 제프리, 필리프 2세 구도에서 1183년 6월에 청년왕 헨리가 이질로 급사했을 때 비로소 중단되었다. 그 뒤 헨리 2세는 슬하에서 양육했던 리처드의 약혼녀인 프랑스 공주 아델과[* 필리프 2세의 이복누나.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인 카스티야 공주 콩스탕스 사이에서 태어난 차녀. 예비 시아버지인 헨리 2세와 간음을 하고 아들까지 낳았다는 의혹이 짙고 헨리 2세가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이혼하려 했을 때 아델을 사랑하여 새살림을 차리려 했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흥미롭게도 헨리 2세의 증손자인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인 카스티야 공주 엘레오노르는 아델의 직계 후손이다.] 막내 [[존 왕|존]]의 결혼에 대해 상위 주군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서 동의를 받았고 프랑스의 플랜태저넷령에 대해 충성 서약을 하는 것으로 아들들에게 상속지와 상속 권한을 꽉 쥐고는 상속에 대해 새로운 결정을 공포했다. (1) 리처드는 아키텐을 포기하고 청년왕 헨리의 몫이었던 노르망디, 앙주, 잉글랜드를 상속받을 것. (2) 아키텐은 막내 존이 양도받을 것. 분노한 리처드는 부왕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아키텐으로 달려가 전쟁 준비를 하였고 그와 동일하게 부왕의 눈 밖에 난 자식이었던 동생 [[제프리 2세]]는 위선적인 정치 공작을 펼쳐 부왕의 호의를 사면서 야심을 실현시키려 했다. 또한 상위 주군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의 우정 및 동맹을 두고 제프리와 경쟁을 벌였고 약혼녀인 프랑스 공주 아델에 대한 결혼을 선언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묵살되었다. 삼형제 사이에 벌어진 맹렬한 신경전은 전쟁으로 변질되었고 헨리 2세가 제프리를 노르망디 관리로 파견하게 되면서 리처드와 제프리의 불화는 삽시간에 극으로 치달았다. 리처드는 우선 제프리를 선택한 필리프 2세에게 위협조로 조롱하는 노래를 널리 퍼뜨리며 분노를 표출한 뒤 >리처드 공께 전해주게나. 리처드 공은 사자요, 필리프 왕은 어린 양으로 보였다오. >---- > 베르트랑 드 보른 제프리와 싸우겠다고 대규모 군사를 일으켰으나 브르타뉴 침공을 개시하기 직전 부왕의 개입으로 불발되었고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을 정치적 볼모로 앞세운 부왕의 명령에 굴복하여 아키텐 전체를 반환해야 했던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이와 반대로 동생 제프리는 승승장구를 거듭했으며 그의 절친이자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열을 꾀하던 상위 주군 필리프 2세는 제프리를 헨리 2세의 후계자로 대우하고 리처드의 고달픈 상황을 철저히 외면하였다. 이같이 동생 제프리에 대해 정치적 열세를 면하지 못했던 리처드와 프랑스 공주 아델을 싫어하던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분노를 삭히며 헨리 2세의 명령을 묵묵히 따르면서도 뒤에서 은밀히 결혼 동맹을 맺을 새로운 신부를 물색했다. 전부터 헨리 2세에게 엘레오노르의 연금을 풀어주도록 청했을 정도로 모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던 나바라 왕 [[안초 6세]] 내외가 그들에게 동맹의 손을 내밀자 장녀인 베렝겔라 공주와 비밀리에 약혼 절차를 밟았다고 믿어진다. 1186년 8월 동생 [[제프리 2세]]가 파리에서 돌연 급사하자 리처드에게 국면을 뒤집을 기회가 찾아오고 거의 30세인 리처드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드디어 동맹을 맺게 되었다. 명운이 다하고 있던 헨리 2세는 가장 총애하는 아들인 막내 존을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아키텐 상속 계획에 박차를 가하며 프랑스 공주 아델과 결혼시키려 했고,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을 산산조각내어 정복할 야심을 숨긴 필리프 2세는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을 재촉하면서 부자를 이간질하는 가운데 상냥함으로 위장하여 리처드를 구워삶았고, 아키텐의 지배권을 꽉 쥐고 헨리 2세의 후계자 자리에 서고자 한 리처드는 필리프의 술수에 완전히 현혹되면서도 나바라 공주 베렝겔라와의 약혼에 대해선 철저히 비밀로 부치고 안초 6세 내외에게 신뢰를 주며 제각기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다. 1188년 11월 18일, 항구적 평화를 물색하려는 회담이 [[교황]]의 노력으로 열렸지만 헨리 2세가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 리처드를 공식 후계자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자 그 자리에서 리처드는 무릎을 꿇고 대륙의 모든 플랜태저넷령에 대해 필리프 2세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 이듬해인 1189년, 리처드는 필리프 2세와 협공하여 부왕과 전쟁을 재개하고 전세가 기울어지자 헨리 2세의 봉신들이 배반하여 그들에게 붙었으며 6월에 헨리 2세가 소수의 지지자인 서자 제프리, [[윌리엄 마셜]], 르노 다마르탱 등과 연합하여 맞서려 했으나 르망에서 대패하고 시농으로 퇴각하였다. 1189년 7월 3일, 리처드와 필리프는 서 있기조차 힘든 헨리 2세를 회담장에 소환하여 [[3차 십자군]] 원정을 마친 즉시 아델과의 결혼, 가장 굴욕적인 조건들을 받아냈다. 3일 후 부왕이 병사하자 리처드는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을 모조리 독식하고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